2009년 10월 16일 금요일

세계 당구의 전설, 이상천을 아세요?


오는 19일이면 이상천 서거 5주년입니다.

고 이상천선수는 우리나라와 미국 양국에서, 나아가 세계 당구계에서 전설로 인정받고 있는 진정한 우리들의 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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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ohyecloudy.tistory.com


이상천 선수는 전국당구대회에서 7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뒤 198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상천은 불과 3년 만에 미국 내셔널 챔피언에 올랐고, 이후 2001년까지 무려 12년간 미국 챔피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상천이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국내대회에서 올린 41연승 기록으로 윌리 호프가 1941년 세운 36연승을 무려 53년 만에 고쳐썼습니다.

1993년 세계투어 성적을 종합한 랭킹에서 1위에 오른 이상천은 1994년 1월 벨기에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후 세계당구프로협회(BWA) 소속으로 미국과 스리쿠션의 본고장 유럽을 오가며 90년대 세계당구의 최고수로 군림합니다.

 1999년 <뉴욕 타임즈>는 이상천을 '스리쿠션계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소개했다. 압도적인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마이클 조던이 NBA의 중흥을 이끌었듯, 이상천이 침체 일로이던 미국 스리쿠션에 새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1954년생인 이상천 선수는 놀랍게도 경기고 서울대를 다닌 KS라인입니다.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당구에 입문한 뒤 영재로서의 안정된 삶을 마다하고 중퇴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당구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상천 선수는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꼬마들(지역의 당구왕좌들)을 잡으러(?) 전국순회를 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이상천은 비정상적인 핸디를 주어가며 게임을 즐기며 지옥과 천당을 오고가는 겜블정신으로 전국 당구장 깨기 투어를 펼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이상천 선수의 당구기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최고의 당구선수가 됐습니다.

이상천 선수는 80년대 초중반 명실상부한 한국챔피언으로 인정받고, 당구장도 몇 개 운영하며 자리를 잡을 무렵 또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2의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989년 프로페셔날의 등용문격인 벨기에 스파 그랑프리에 출전, 3쿠션 15점을 단 큐에 쳐내 관전 중이던 벨기에 국왕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습니다.

그 후 이상천 선수는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이상천 선수는 또 미국에서도 당구고수를 찾아 미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며 미국대륙의 일인자가 된 이상천은 세계유명선수들의 관심 대상 1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4년 3쿠션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수가 됐습니다. 그해 1월10일 벨기에에서 열린 월드컵 3쿠션 파이널대회 결승에서 신예 쿠드롱 선수를 3대1로 제압하며승점90점을 득점, 총220점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대회 제패로 총6만 2천 달러(약 6천 8백 2십만원)의 상금을 받았습니다.

이 대회는 다른 종목의 월트컵과 달리 1회성으로 열리는 단일 대회가 아닙니다. 이 대회는 세계당구월드컵(BWA)주최로 해마다 5~7개국 투어경기로 진행됩니다. 매 대회마다 1등 60점, 2등 45점, 3등 30점 순으로 부여되며 가장 중요한 마지막 파이널대회에서는 50%의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이상천 선수는 당시 터키 대회에서 1위, 네덜란드 3위, 일본 4위, 독일 6위를 각각 기록하였으며 이탈리아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3개 대회 우승으로 강력한 1위를 후보이던 브롱달이 파이널 전에서 16강에서 탈락하는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틈타 이상천 선수는 가산점이 부여되는 파이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210점을 득점한 토브욘 브롬달 보다 10점을 앞서 1993~1994 세계3쿠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상천 선수는 세계최고 수준의 상금과 개런티, 스폰서 비를 받았고, 대형 당구장 운영으로도 큰 수익을 냈습니다.

이상천 선수는 세계적인 당구 천재로 인정받고 난 뒤 훌훌 털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귀족적이고 신사적 스포츠로 대접받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당구는 도박이자 불량배들의 놀이이며, 당구장은 깡패들의 아지트 라는 것이 당시 우리들의 모습이었으니......
 
"당구를 확실한 스포츠로 인식 시키겠다."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 선수들이, 스포츠 선수 대접을 제대로 받도록 해 주겠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한국당구를 발전을 위해 복귀한 그는 2004년 6월 제4회 대한당구연맹 회장에 취임했지만 큰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2004년 10월 19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당구협회(BCA)는 2007년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생리(SANG LEE) 인터내셔널 오픈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댓글 2개:

  1. 이상천선수가 케롬 까페 열지전에 생활고를 무진장 격었는데요??

    스누커나 포켓으로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3쿠션으로는 전세계 어디가든 돈이 안되요!!

    세계선수권대회나 월드컵 우승상금이 600만원 정도 빡에는 안됩니다.

    그런데 경비가 400만원 깨지죠!!

    이상천씨와 같은 시대 스티븐 데이비스가 벌어드렸던 몇천억원 대의 수익과 비교대는 겁니다.

    3쿠션 잘치면 돈이 많이 벌었을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은 지워버리세요!!

    전세계 2.5%만이 즐기는 종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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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상천씨가 국내에서 활동할때 당시 이동휘 씨라는 분한테 2년동안 계속 졌어요.
    이동휘씨는 당시 최고의 3쿠션 허슬러였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으면 이동휘씨가
    자신이 이상천씨에게 지면 당구를 그만두겠다고 호언장담했죠. 그정도로 뚜;어났습니다
    2년동안 계속 지다가 딱한번 이상천씨가 이긴겁니다 1이닝에 36개 친건..
    그건 컨디션이 최고로 좋을때 어쩌다가 나오는 수지일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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